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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일상의 자유로움을 먼저 누리기보다는

방역수칙이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막내인 아들의 깜짝 제안으로 안반데기를 가
게되었어요

알고 보니 아들이 그곳에 가려고 벼르고 있었다는군요.

저녁밥으로 김밥을 말아 컵라면도 준비하고 별을 보러 출발했습니다.

 별은 강릉에서도 보일 텐데 꼭 거기까지 가야 하나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구비구비 오르고 올라 경사도가 심하지만 유턴보다 더 심해 아차하면 각도가 안맞아 다시 후진하고 올라야 하는 도로 
운전자, 자동차 고생 고생을 하며 오르고 올라 안반데기에 도착했습니다
강릉에서 출발할 때 어둑해질 무렵이었는데 도착하니 일곱 시인데 깜깜합니다.

주차장이 여러 곳에 있어 불편하지 않았고 드디어 마지막 주차장에 주차했습니다.
넓은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고 날이 추워서인지 드문드문 올라오는 차량 덕에 을씨년스럽지는 않았어요.
어디에나 뜨는별, 안반데기에서 보는 별은 남다른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주차 후 한참 걸어야 하지만
별들의 향연을 보고자 오르는 길은 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망대까지 올라 사진을 찍었는데 어째 이런 일이

무수히 많은 별이 사진에 찍히지않습니다. 
아이폰을 쓰는 딸과 나는 난감하네 소리가 절로 납니다.
마음과생각에 저별을 담는 수밖에 없어 ㅠㅠㅠ 작은실망을 하는데,
아들이 방법이 있다고 하며 갤럭시로 사진을 찍어 보여줍니다.
근래에 바꾼 갤럭시 핸드폰에 밤하늘 별을 생생 촬영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오예
그곳에 가족과 함께 온 모르는 남자분도 사진이 찍히지 않아 난감해하던 차에 우리 대화내용을 듣고 

자신의 폰에 그런 기능 설정을 부탁했으나 아쉽게 그분 폰은 그 기능이 없다는 말에 실망하더군요.
아들이 그러면 서진을 보내주겠다고 하니 기뻐하는 그분 가족의 모습을 보니

사진 나눔 하기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아들이 대견스럽게 여겨집니다.
은하수를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칠월이나 팔월에 다시 오기로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남편의 캠핑카를 가지고 온덕에 컵라면을 전자레인지에 땡 돌려 김밥하고 먹었는데 그 맛이 꿀맛입니다.
자동차 지붕이 데크로 설치되어 있어


사다리를 꺼내 자동차 위로 올라가 아들이 만든 라탄 전등도 켜고

루프탑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와 밤하늘의 별 둘만 있는 것 같습니다.
무소유의 아름다운 창조물을 보는 시간입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
물론 다른 곳도 많지만 강릉 안반데기 별 보러 은하수 보러 가보셔요.
아름다운 자연과 모든 것을 만드신이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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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집콕 하고 있는데 연일 맹위를 떨치는 한파에 더욱 움츠러듭니다.


동장군의 기세가 꺾이지 않아 이집저집 보일러와 수도가 얼어 불편과 곤란이 이민저만 아니고


예전에 수도 얼었던 경험이 있어 온수 냉수 적당한 온도에

똑똑 떨어지게 하지 않고 졸졸 흐르게 틀어놨고

주방 쪽 보일러실 문을 열어 세탁기와 보일러실도 얼지 않게 했습니다.

밤에는 계속 보일러가 운전 되도록 해놓고 이한파가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도 보일러배관까지 모든 게 얼어버리면 수리 비용이 매우 비싸

 바짝 긴장하며 지내 그나마 얼지 않아 다행입니다.

송지호 해변앞 호텔 썰렁 


답답함을 느꼈는지 남편이 바람쐬러 가자고 합니다.


갑자기 닦 쳐온 코로나 때문에 일상생활을 맘 편히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도시락을 싸서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주말에 썰렁한 강릉을 떠났습니다.

해안로로 가고 싶었는데 내비게이션 알려주는 대로 고속도로로 달려갑니다.

썰렁한 도로
속초에서 국도로 빠짐

목적지 송지호 해변은 캠핑하기 좋다면서 떠나는 길에

( 강릉도 차박 하기 좋은데)

코로나로 마땅히 사 먹기도 어렵고 해 먹자니 춥고 바람도 강풍이라

집에서 김치, 삼겹살 양념해서 볶고 오징어 데쳐 김하고 그렇게 도시락을 싸 갔습니다.

도시락

해변은 코로나로 해돋이 인파를 막기 위해 쳐 놓았던 줄이 있어 어수선합니다.

날씨도 매우 춥고 거기에다 바람까지 거세다 보니 아름다운 해변이 제기능을 잃어버린 듯

 열 손가락에도 모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잉 이날씨에 뭐 하는 거지?

자세히 살펴보니 대단한 젊은이입니다.

여덟 명의 젊은이들이 있는데 여섯은 서핑 교육을 받는 가봅니다.

훈련교관도 교육생도 참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가져간 도시락을 먹고 돌아왔습니다.

고속도로는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불어 운전하기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자동차가 휘청휘청

돌아오는 길은 해안도로와 국도로 돌아왔습니다.

다음에 온화해지면 다시가 캠낚을 해볼 참인데,

생각만 해도 오싹 한기가 드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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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사 옆에 있는 대나무 줄기의 색이 검정색인 오죽입니다.

왼편에는 몽룡실이있습니다. 몽룡실과 오죽 사이로 조금 걸어가면 안뜰과 사랑채가 있습니다.

가노라니 왕성한 탐구력을 가진 소년이 어른 어깨 정도 높은 곳을 뛰어올라 오죽을 만져보고 있습니다.

역시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대한의 소년입니다. 궁금한지 살펴보는 소년이 미래에 식물학자가 될는지,

꼭 필요한 대한민국의 인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소년의 앞날을 축복하며 잘되기를 기도 합니다.

여기는 오죽헌 안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안채 옆 별당에 전시되어있는 신사임당의 시

어머니를 그리며

산 첩첩 내 고향 여기서 천 리 꿈속에도 오로지 고향 생각뿐

한송정 언덕 위에 외로이 뜬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는 바다 위를 오고 가겠지

언제쯤 강릉 길 다시 밟아 가 비단옷 입고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할꼬

오랜 옛날에는 여성의 존재를 심하게 말하자면 있는 듯 없는듯한 존재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천재 예술가 신사임당!

사임당은 1504년 강원도 강릉 북평촌(현재 강릉시 죽헌동>에서 아버지 신명화와 강릉에서 태어나 자란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

오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고려 태조 건국공신인 신숭겸의 18대손이고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시험을 보려 하지 않다가 마흔이 넘어 진사가 되고

관직을 멀리하며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피할 수 없는 것인지

 당파 싸움 기득권 싸움에 연이어진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관직에 오르지 않은 덕분에 화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직에 올랐었더라면 참 온 집안이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겠지요.

왼쪽이 사랑채 가운데 들어가는 곳이 안채인 것 같습니다.

또 하나 현재 우리가 사는 생활상을 보면 아버지 중심의 가족 친지로 이어지는 문화인데

사실 외가 쪽과 편하고 가깝고 친근함을 더 느끼지 않나요? 친가는 겉으로 가까운 것 같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아무튼 가까이하기에는 복잡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거의 외가 쪽과 가깝지 않나요?

친가하고 가까운 집은 몇 안 되는 것 같고 사람의 마음속을 알 수 없으니 어느 쪽이 가깝다고 말하는 것도 참 그렇습니다.

아무튼, 아들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부모인데 말로만 행복을 비는건 좀,

실제 행동은 다른 인간의 이기심을 어찌하겠습니까

부계사회화 된 시기는 조선 시대부터라고 알고 있었어요, 아하 그렇구나 하며 가볍게 넘겨버리듯 그렇게 여겼습니다.

오죽하면 시집 시자 만 봐도 기겁하고 돌아선다는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그러려니 문화니까 라고 여기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랑채 옆면입니다.

문화 !

문화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좋게 변해야지 우리 문화는 좋은 점도 그렇지 않은 점도 있지 않나요?

좋지 않은 문화는 과감히 개혁하고 좋은 문화는 계승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지구촌이 한가족이라고 하는데 밀려드는 외국 문화중에 좋은 건 빨리 받아들이지 않고

좋지 않은 건 열심히 몸에 익히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며 산다는 문제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사임당은 친정에서 터를 잡아 열린 교육으로 자녀를 기르고 비록 지금으로 보면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멋진 천재 예술가이자 진정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사랑채 정면

외갓집에서 자란 사임당

사임당 어머니 본관은 용인이고 강릉 사람으로 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외손녀로

외조부 밑에서 자랐고 오죽헌을 지은 사람인 최응현의

아버지 최치운은 당시 이조참판을 지냈던 분이라고 합니다.

부계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지 않았던 시기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부계사회 가족문화가 자리 잡은 것은 17세기 이후라고 하는데 앞으로는 시대가 변해가고 있어

고부간의 갈등이 사라지는 시대가 오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임당 이 자랐던 시기처럼,

나도 아들이 있지만 내 아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말로만 행복을 바라는 엄마는 되지 않아야 하겠지요. 갑자기 뜨거워지는 내 마음은 여름이라서가 아닌

불합리한 부분이 떠올라서 크크크 인생은 각 사람의 소신대로 소신껏 살아가는 것이지요,

사임당이 친정에서 거주하는 것이 궁금하긴 했는데 오죽헌 덕분에 확실히 정리되었습니다.

사람이란 죽을 때까지 배워가는 건가 봅니다. 늦게야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만 해도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사임당의 이름을 알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옛 여인들의 이름이 묻히듯 그렇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신사임당 이외에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여류 예술가이자 어머니인 사임당은 신인선이라는 예쁜 이름이 있었습니다.

신인선! 7살부터 스승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데  

아버지보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최 씨와 오죽헌에 살면서 시와 그림 글씨를 전수받았다고 합니다.

열아홉에 덕수이씨 이원수와 결혼 2년 뒤 맏아들 선, 26세 때 맏딸 매창, 33세 셋째아들 율곡을 낳고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고 합니다.

사임당이 38세 때 서울 시집에 정착하기까지 20년 다 되도록 강릉에서 살았다고 하니

사임당 어머니 이 씨도 아들이 없어 친정인 강릉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아들이 없는 친정에 사임당이 살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합니다. 당당하고 똑 소리나는 여성이었을 것 같습니다.

결혼 몇 달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기도 했고 시댁인 파주 파평면 율곡리에 살기도 헸으며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살았었다고 합니다.

가끔 친정에 가서 친정어머니 말동무도 해드리는 사이에 셋째인 율곡 이이를 강릉에서 낳았다고 합니다.

38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 ( 청진동 )에서 살다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고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몸이 아팠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때 사임당 남편의 나이 51세였고 사임당이 사망한 후 10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사임당이 죽기 전 어린 자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남편의 언행이 염려되어 유언으로까지 남겼는지,

재혼하지 말라는 사임당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이 원수는 재혼했다고 합니다.

아내의 유언을 지키지 않은 사임당 남편, 어지간한 사람입니다.

사임당은 뒤에 아들 율곡이이 덕분에 정경부인에

증직< 충신 효자 및 학덕이 높은 사람 등에게 죽은 뒤에 벼슬을 주거나 높여주던 일>

사임당의 유적지로는 탄생지인 오죽헌과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 조운산이 있습니다.

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율곡의 나이는 16세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금강산에 입산할 정도로 방황했다고 합니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한 외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은 관직에 나가서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율곡이 고백하기를

조정으로 본다면 신은 있으나 마나 한 보잘것없는 존재이오나 외할머니에게 신은 마치 천금의 보물 같은 몸이오며

신 역시 한번 외할머니가 생각나면 눈앞이 아득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아들 없는 집 둘째 딸로 태어나 시와 글씨 그림에 천재적 재능이 있어

자신의 재능을 꾸준히 발전시키며 살아온 신사임당은 인품과 재능을 두루 갖춘

최고의 여성이자 어머니 사임당, 율곡의 어머니로 유명하지만, 당시 신사임당이 살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당차고 당당한 여성 신사임당을 그려봅니다.

같은 시대 유명한 소세양이라는 시인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 신 씨의 그림 족자라는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놀라우리만치 뛰어났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그 시대 최고의 시인이 사임당 그림을 주제로 시를 지을 정도니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예술가이자 어머니입니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조선 최고화가 안견 다음가는 화가라 칭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여성이라서 안견 다음이라고 했을지, 아니면 정말 그랬을지 모르지만

하여간 최고임은 확실힙니다.

화가로 유명했던 사임당이 여성의 상징으로 존경받게 된 것은 사후 백 년이 지난 17세기 중반이라고 합니다.

유학자 송시열이 사임당의 그림을 보고 칭찬하고 감탄하며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을 낳았을 것이라는 평가에서 존경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율곡이 유학자들의 존경 대상이 되자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적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천재 화가 보다는 율곡을 낳은 어머니로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확고해져 갔다고 합니다.

사임당은 천지의 기운을 받아 율곡을 잉태한 여성이었고 훌륭한 태교와 교육을 통하여 율곡을 기른

어머니 사임당으로 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임당의 일생은 현모 현처인거 같습니다.

화가로 효녀로서도 훌륭한 여성인 신사임당을그 시대에 남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으로

천재 예술가로서 사임당 일생보다 아내로 어머니로의 삶이 더 나타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사임당을 존경의 대상이 되도록 했지만 사임당의 정체성을 고정화하게 되어

다양한 면으로 사임당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훗날 변화하는 시대에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시각으로 천재 예술가의 삶이 다시 평가되고 펼쳐지게 되는 그 날이 꼭 오게 될 줄 기대합니다.

이 땅의 21세기 여성의 본보기인 당당한 여성 신사임당으로 평가되기를.

사랑채를 지나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니까 작은 건물이 나옵니다.

예쁘게 지어진 건물은 조그마합니다. 이곳이 어제각이라고 하는데 벼루와 격몽요결이 보관되어있습니다.

정조임금이 율곡 선생의 벼루와 격몽요결이 보관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으로 가져오게 한 다음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칭송한 글을 새기고

격몽요결에는 머리글을 잘 지어 보관하라며 다시 보냈는데 임금의 명을 받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어제각이라고 합니다.

벼루는 어릴 때 율곡 선생이 쓰시던 것이라서 작고 예쁘게 생겼습니다.

 

 

얕은 생각과 마음으로 감히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가장 적은 부분이라도 알 수 있어 의미 있는 방문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임이 틀림없어 다음에 다시 방문하여 꼼꼼히 살피고 알아가며

민족의 자랑인 천재 예술가와 대학자의 삶을 조금씩 처음부터 알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무더운 여름철 또한 신께서 주신 사계절 중 하나로 무더위도 즐기는 것이 좋겠지요.

이제 본격적인 휴가철로 접어들게 되는데,

건강과 행복이 더해지는 알찬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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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사금채취로 번화했던 곳으로 우리의 소중한 지하 자원중

금이 많이 나왔던 곳이라 우리 민족들을 혹사 시켰던곳으로

목숨을 잃은 부지기수의 사람의 삶의 눈물과 애환 그리고 한이 서려 있는곳으로

지하동굴이 경이로움보다는 일제의 만행을 새겨볼수있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곳


화암동굴의 입구로 올라기는 길은 걸어 올라가도 되고
레일 바이크 비슷한거 타고 올라가요.
이름을 외우지 못해서,


사금을 물로 쌀일어서 돌골라내는것 처럼 금을 골라내는 과정,


노릇 노릇하게 보이는것이 금이 포함 되어있는 금광석
저 기계는 드릴 비슷한거 



 
일제 초기이니 일제의 만행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각오 가운데 돌아봄.
당시에는 인생의 마지막 희망의 곳일거 같았어요.


경사가 심하지 운동화 필수 조심조심 미끄러우니깐


 이런 사다리로 통행을 했다고 하니 .....


전시용으로 환하게 만들어 졌지만
당시에는 빛이라곤 그야말로 한 점 


 이런 깊은 지하에 만화영화 케릭터가 나오도록 꾸며 놓은거
어린이들의 견학을 위해 만들었나
 발전의 놀라움, 


석주의 설명서


 애독 작가인 김진명님과 함께하는 1박2일 추억 만들기 
인터파크라는 쇼핑몰에서 50쌍을 초대한 이벤트 인데
큰딸이 신청 당첨됐어요. 두근두근 기대돼요.
청포대 리조트로 간다는데 100명의 애독자와 함께여서
그 시간이 기다려져요. 이런일이 !
평화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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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설명 참고했어요.

 일제 초기시대 강원도 정선 화암동굴 입구에 있는 
탄광촌의 당시의 생활상을 전시해 놓은 곳이라고합니다.
삶의 모습과 생활의 다양함속에  
닥쳐진 현실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며 낙심하는거 같지만 
모든 시간이 지난후에는 지나간 시간의 개인의 삶과 
인생이 묻어있는 소중한 흔적이 남겨진 현장이지요.
과거 산촌 특히 탄광촌의 생활상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여행 하는중 기다리는 틈새시간을 통해 둘러 볼수있어 
탄광촌의 옛생활상을 살며시 들여다 봤습니다. 
보고 겪지못한것을 신기해 하며 보고 있지만 
일제시대 라서 조국의 소중함을 느끼는 마음가짐으로 봤어요

일제 초기 탄광지역의 하루하루의 삶의 시작을 먼저 깨웠을 부엌
아침밥을 제일 먼저 짓고 먹고 하루의 시작을 하게 하는 부엌
 오른쪽이 밥솥 , 왼쪽 큰 거는 뜨거운 물을 데워 쓰는 물솥
벽에 칸은 찬장  빈틈이 없어서 쥐가 드나들지는 않을 거 같지요.


어릴 적 사용한 거 같은 등잔 나도 기억나는데
몇 년 후에 전기가 들어와 엄마에 대한 추억과 함께 묻혀버렸지만..
저 뒤에 바구니는 반짇고리인가 잘 모르겠네,


왜 까만색으로 이불을 만들었는지도 궁금해지는 걸


당시의 점빵
파는 물건의 종류 중 오 ㅡㅡㅡ콩나물이 먹음직하게 보이네.
점빵은 지금의 구멍가게


여기가 바로 쌀 점빵


산촌이나 농촌이나 어촌 어디서든지 꼭 필요했을 대장간


금광석을 채취해서 나르는 통 뭐라고 부르는 건지 잊었네


시상에나 자세히 가까이 찍었는데 찍고 보니 이럴 수가
너는 왜 거기 꼽사리 껴 있었니
반갑지 않은 불청객 사투리로 파리는 잡아야 하는데
너 알지 사투리로 포리


고향에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지 [나훈아 님의 고향역]
물레방아


금광석 채취해서 금을 골라내는 과정에 필요한 장비들
금은 과거나 미래에도 소중한 금광석 


자갈 
이 사진은 큰 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작은 돌멩이입니다.             ]
공깃돌 만한 것

이런 코너가 있는데 (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 사진 찍어
 게시판에 올려주면 선물 준데요) 


 할아버지를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갓 쓰고 도포 입은 사진 본 적이 있습니다.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하고 똑같은 생각?
힌트 쫌주면 저거 쓰고 소금,


 전시관 아니면 보기 어려운 신발


이거? 이거도 실제 본 적은 없는데 가마니 짜는 거래요.



화로. 풍로 이거는 나도 알아
화로는 밤 구워 먹고 엄마가 주전자 모양으로 생긴 옛날식 다리미 하실 때
화로에 숯 담아 놓았던 거입니다.


고향이 그리움으로 마음에 남는 건
돌아갈 수 없고 그리운 사람이 떠나고 없기 때문인 거 같아요.

변해버렸고


삶에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주어진 시간이 과거의 시간보다 중요한 거는
새로운 시간의 추억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가족이 곁에 있고 사랑을 주어야 할 많은 사람이 있고
아름다운 마음과 사랑의 손을 펴 보내는 사람이 있어  
내일이 밝게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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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쌀점방 2010.11.24 13:13

    추억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요즘 젊은 이들은 보질 못해서...잘 모르지만...
    저 콩나물시루와..살 댓박....ㅋㅋ..
    저도 대구 우리학교 옆이 온통 쌀점방입니다..
    그래서..
    제 닉도...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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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너구리상 앞 출발

꿈많은 소년처럼 여행좋아하는 남편 
문득 바람이 좋아 자연이 좋아 떠나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지 
여행사에 정선 5일장을 예약을 했다는군요. 
소년의 마음을 품은 나의 남편은 
떠나는 당일에 가면서 먹겠다고 촘 크랙커를 챙겨 출발했답니다.
출발당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길을 뚫고 
잠실 너구리가 환영하는 곳으로 슈우웅ㅎㅎㅎ
관광차들이 예약한 관광객을 기다리느라 너구리상 옆에 대기중입니다.
휴일이라 차가 막힐텐데 기대반 근심반 
차량에 탑승 하고보니 왠걸!  관광버스에 빈자리도 없이 
꽉 차 있었던 여행 동행자들,
 내리는 빚줄기 소리에 정선에는 비기 안오겠지 라고 
기상청의 예보에 기대를 올려놓고 출발했어요.
 기사님의 안전운행을 바라면서 출발하는 버스에 함께하는 분은 
  50대 부부들이 많았어요
자연을 느끼고 싶어하는 나이인가? 나도 50대인데 .... 여하튼 즐겁게 출발한 여행길!

정선으로 달려갑니다.


고속도로  진입해서 차내에서 공급해주는 이침식사를  
식사접시를 전달해서 맨뒤부터 식사를 하게 되는데
 봉사정신이 뛰어난 충청도 아저씨 사투리로 하시는말씀
이짝은 내가 허니께 그짝줄은 그짝이 하시요 옹 하시며 
옆에 않으신 분과 대화의 물꼬를 트시는 모습과 사투리도 정겨운 모습이었지요.
좌 우측 식사접시를 계속 뒤로 넘기는 가운데 웃음꽃이 피어나고 
 화기 애애하게 전달하는 도시락을 맛있게 먹으며
  즐거운 분위기 색다른 체험의 추억이 쌓여가는 시간이었어요.

 도시 좁은곳에 갇힌 듯한 시간을 자연으로 보내고
 자연의 너그러움을 채우는 여행길 
롯데월드 너구리상 7시40분 출발 = 정선 화암동굴 가는길은 = 송파 IC를 지나 = 
중부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를 지나다  = 국도로 가는길 = 막히지 않아 정말 좋았답니다

안전운행도 믿음직, 즐겁게 흘러 나오는 노래는 여행객들 나이에 걸맞는 당시의 유행가가 흘러 나왔는데   
나훈아님의 잡초가 흘러 나오게 되니  
모두 약속이나 한듯이 합창으로 이어지는 열창의 시간이었답니다.

잡초 나훈아

아무도 찾지않는 바람부는 언덕에 이름모를 잡초야
한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발이라도 있으면은 님 찾아갈텐데 손이라도 있으면은 님 부를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네

아무도 찾지않는 바람부는 언덕에 이름모를 잡초야
한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발이라도 있으면은 님 찾아갈텐데 손이라도 있으면은 님 부를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가진게 없어 아무것도 가진게 없네

아무도 찾지않는 바람부는언덕에 이름모를 잡초야 
한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함 불러 보실레요?
 
 가이드님께서 분위기를 업시켜주는 대화가운데 마지막 멘트중에 하는말 
입술이 예뻐질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이런저런 답이 나왔지만 알려주신 답은 수긍 갈만한 답이었어요.
 정답은 덕담을 많이해라 이었답니다.

 

아라리 민속 마을의 옛 가옥

 도착한 중간 경유지 민속마을은 지역 경제를 위해 자치단체에서 아라리촌을
관광자원으로 삼아  
춥고 바람 많은 정선의 옛날 주택과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전통 와가와, 굴피집, 너와집, 저릅집, 돌집, 귀틀집의 전통가옥과 주막,
물레방아, 통방아 연자방아, 농기구 공방, 방앗간........ 등이 지어져 있어요.
또 아라리촌을 두루 다니다 재미있는것도 보게 되었답니다.


아래를 읽어 보세요.
옛날에 오랜 옛날이었겠지만  정선에 한 양반이 살았는데
그 양반은 집이 가난해서 관가에서 내주는 환곡을 빌려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려해를 살다보니 관가에서 빌려 쓴 빚이 천섬이 넘게 되어 이 빚을 갚지 못해서 마침내 감옥에
끌려갈 운명에 놓이게 되었대요.
그 틈에 양반이 되기를 바랐던 이웃의 부자 상민이 양반의 빚을 대신 갚는 조건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게 된답니다.
위의 내용은 사실이고요. <아래는 제 마음대로 사진의 내용 설명을 해봤어요. 재미로요



나리 내가 빚을 갚아 줄테니 양반 증서를 나한테 파시요 잉  전라도 사투리 ㅎㅎ강원도인뎅
군수님이 양반에게 하는 말=양반 팔고 편히 살그라 니감옥 가는 거보다 팔아 뿌리라 팔아 ㅡ 퍼뜩 양반 문서 야 헌 테

내가 부자인데 아쉬운 건 양반 이 아니라는 거 한 가지
앞 뒤 재지 말고 사자 양반 문서
이보게 고맙네 빚을 갚아줘서 흑흑 양반 이제 자네가 함세 흑흑 ,ㅡㅡ > 양반의 빚을 갚아준 상민에게 본격적으로 조목조목 양반이 되면 지켜야 할 조목들과 양반이 됨으로써 얻게 될 특혜에 관하여 설명을 해주는 군수님 
도대체 해 저물기 까지 끝이 안 나요...  끝이ㅡㅡ <거들먹거리고 싶은 상민 양반 문서를 샀으나
양반의 품위가 몸에 익혀지지 않아 애 먹고 있지요.
지킬 건 왜 이렇게도 많은 거야 ㅡㅡㅡ

 


군수님의 양반 되면 이러쿵 쿵쿵
양반이 되면 저러 쿵 쿵
설명을 듣고 난 상민 걱정이 태산 보다도 더 높은 걱정
철퍼덕 주저앉아서 양반 힘들어 못하겠네 통곡 으으으 내 돈 아까워


양반 문서를 들고 온 군수님 상민에게 양반문서를 건네주는데
상민이 하는 말
아이고 엄니 사람 살려 엄니 나서려 양반 싫소 양반 싫소 나는 상민 헐 텡게
양반 문서 고 뭐고 다 싫으니 제발 가지고 나가서 
대신 갚아준 돈 안 돌려주어도 좋으니 나가요 나가  ㅡㅡㅡㅡ아 이렇게 해서 양반은 =상민이 빚을 갚아주고 양반 문서도 다시 돌려주어서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았답니다.
이렇게 해서 상민은=천섬의 쌀을 주고 산 양반 문서를 돌려주고 자연인으로 살았답니다.


싱겁죠 이야기
그럼 재미있게 한번 각자 엮어 보심은 어떨까요?
삶의 무게가 더해져서 살아온 세월들 나이가 들어 자녀들이 자라고 
어느 날 자녀들이 더 이상 도움 없이 살아가게 될 때 허전함 느끼시는 분은 안 계시죠?
요즘에는 <허전함> 느끼는 그런 분들은 안 계실 텐데요.
저도 그런생각을 안 하려고 생각해요.
그러한 상황이 올땐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여행하는 삶은 정신건강은 물론이고 삶의 질이 높아질 거 같아요.
장래희망?
끊임없는 욕망의 숲에서 어느날 자연의 한 부분임을 느껴지는 때에
자연인 자연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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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지만 9월은 시원해질거라 생각하며
바람따라 자연이 좋아 떠난 여행길입니다.

 아름다운 기암괴석으로
형세가 금강산과 아주 유사하다 해서 붙여진 소금강 !

의학박사들이 음이온이 많이 발생되는 곳으로 
소금강 ,지리산 노고단.강진의 주자산을 꼽았다는데 건강산 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음이온이 가득한 산이라고 합니다.

강원도는 산이 많아 논농사로는 적합하지 않아 밭농사 위주의
더덕, 산나물 등이 풍부해 식량을 줄이기 위해 풍부한 산채 취나물을 넣고 지은 곤드레밥이 전해져 내려와

 정선의 대표음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리랑은 전국각지에서 불려지고 있는

기나긴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의 마음을 적시며 

함께해온 삶이라고 할수있지 않나 생각이 드는군요.

 


삶의 애환과 희노애락이 묻어져

시름과 위로와 마음을 달래주는 어머니와도 같은 민요,
격동의 세월 외세에 시달리는 순간과 격변의 시대에도 함께해온 아리랑은
조국을 잃은 마음속에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과 꿈을 품도록 하는 아리랑이었을거 같습니다.
 아리랑은 저마다의 깊은 뜻과 의미가 있지마는

아리랑의 본고장 정선아리랑은

조선 개국 초기에 고려왕조를 섬기던 선비들이 송도를 떠나
정선지방에 숨어 지내면서 입지 시절의 회상,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 맺힌 시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 아리랑이 해석이 되어 알려지면서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던 토착요; 지방 민요에
후렴을 달아 불린 것이 지금에 정선 아리랑이라고 합니다.
정선의 산간마을 주민의 소박한 생활 감정이 담긴 민요 정선아리랑

아직은 고1짜리 아들이 있어 온전히 나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지만

아들이 나 자신의 도움 없이 살아가게 될 때에
딸들이 행복을 찾았을 때 그때부터 엄마이지만

자연 속에 올려져 살아가는 한 사람의 나를 돌아보며
자연을 벗으로 삼아 살아볼까 합니다.
자연 속에 변함없는 순수의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 사는 세상이었으면 하는 소원을 날려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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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쁜아빠 2010.09.03 13:07

    대학시절 졸업여행 대신 문학기행을 할 때의 정선은 참 운치 있고 좋았었는데
    10년 후 다시 가보니 이상하게 변한 아우라지며, 이미 죽어버린 몰운대 소나무며...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네요.

    배움ing님의 포스트를 보니 지금은 또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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