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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여행 & ( 민족의 자랑 오죽헌 ) 천재 예술가 신사임당 본문

솔향 강원도

강릉 여행 & ( 민족의 자랑 오죽헌 ) 천재 예술가 신사임당

배움ing 2015. 7. 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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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사 옆에 있는 대나무 줄기의 색이 검정색인 오죽입니다.

왼편에는 몽룡실이있습니다. 몽룡실과 오죽 사이로 조금 걸어가면 안뜰과 사랑채가 있습니다.

가노라니 왕성한 탐구력을 가진 소년이 어른 어깨 정도 높은 곳을 뛰어올라 오죽을 만져보고 있습니다.

역시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대한의 소년입니다. 궁금한지 살펴보는 소년이 미래에 식물학자가 될는지,

꼭 필요한 대한민국의 인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소년의 앞날을 축복하며 잘되기를 기도 합니다.

여기는 오죽헌 안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안채 옆 별당에 전시되어있는 신사임당의 시

어머니를 그리며

산 첩첩 내 고향 여기서 천 리 꿈속에도 오로지 고향 생각뿐

한송정 언덕 위에 외로이 뜬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는 바다 위를 오고 가겠지

언제쯤 강릉 길 다시 밟아 가 비단옷 입고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할꼬

오랜 옛날에는 여성의 존재를 심하게 말하자면 있는 듯 없는듯한 존재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천재 예술가 신사임당!

사임당은 1504년 강원도 강릉 북평촌(현재 강릉시 죽헌동>에서 아버지 신명화와 강릉에서 태어나 자란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

오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고려 태조 건국공신인 신숭겸의 18대손이고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시험을 보려 하지 않다가 마흔이 넘어 진사가 되고

관직을 멀리하며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피할 수 없는 것인지

 당파 싸움 기득권 싸움에 연이어진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관직에 오르지 않은 덕분에 화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직에 올랐었더라면 참 온 집안이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겠지요.

왼쪽이 사랑채 가운데 들어가는 곳이 안채인 것 같습니다.

또 하나 현재 우리가 사는 생활상을 보면 아버지 중심의 가족 친지로 이어지는 문화인데

사실 외가 쪽과 편하고 가깝고 친근함을 더 느끼지 않나요? 친가는 겉으로 가까운 것 같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아무튼 가까이하기에는 복잡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거의 외가 쪽과 가깝지 않나요?

친가하고 가까운 집은 몇 안 되는 것 같고 사람의 마음속을 알 수 없으니 어느 쪽이 가깝다고 말하는 것도 참 그렇습니다.

아무튼, 아들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부모인데 말로만 행복을 비는건 좀,

실제 행동은 다른 인간의 이기심을 어찌하겠습니까

부계사회화 된 시기는 조선 시대부터라고 알고 있었어요, 아하 그렇구나 하며 가볍게 넘겨버리듯 그렇게 여겼습니다.

오죽하면 시집 시자 만 봐도 기겁하고 돌아선다는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그러려니 문화니까 라고 여기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랑채 옆면입니다.

문화 !

문화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좋게 변해야지 우리 문화는 좋은 점도 그렇지 않은 점도 있지 않나요?

좋지 않은 문화는 과감히 개혁하고 좋은 문화는 계승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지구촌이 한가족이라고 하는데 밀려드는 외국 문화중에 좋은 건 빨리 받아들이지 않고

좋지 않은 건 열심히 몸에 익히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며 산다는 문제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사임당은 친정에서 터를 잡아 열린 교육으로 자녀를 기르고 비록 지금으로 보면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멋진 천재 예술가이자 진정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사랑채 정면

외갓집에서 자란 사임당

사임당 어머니 본관은 용인이고 강릉 사람으로 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외손녀로

외조부 밑에서 자랐고 오죽헌을 지은 사람인 최응현의

아버지 최치운은 당시 이조참판을 지냈던 분이라고 합니다.

부계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지 않았던 시기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부계사회 가족문화가 자리 잡은 것은 17세기 이후라고 하는데 앞으로는 시대가 변해가고 있어

고부간의 갈등이 사라지는 시대가 오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임당 이 자랐던 시기처럼,

나도 아들이 있지만 내 아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말로만 행복을 바라는 엄마는 되지 않아야 하겠지요. 갑자기 뜨거워지는 내 마음은 여름이라서가 아닌

불합리한 부분이 떠올라서 크크크 인생은 각 사람의 소신대로 소신껏 살아가는 것이지요,

사임당이 친정에서 거주하는 것이 궁금하긴 했는데 오죽헌 덕분에 확실히 정리되었습니다.

사람이란 죽을 때까지 배워가는 건가 봅니다. 늦게야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만 해도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사임당의 이름을 알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옛 여인들의 이름이 묻히듯 그렇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신사임당 이외에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여류 예술가이자 어머니인 사임당은 신인선이라는 예쁜 이름이 있었습니다.

신인선! 7살부터 스승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데  

아버지보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최 씨와 오죽헌에 살면서 시와 그림 글씨를 전수받았다고 합니다.

열아홉에 덕수이씨 이원수와 결혼 2년 뒤 맏아들 선, 26세 때 맏딸 매창, 33세 셋째아들 율곡을 낳고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고 합니다.

사임당이 38세 때 서울 시집에 정착하기까지 20년 다 되도록 강릉에서 살았다고 하니

사임당 어머니 이 씨도 아들이 없어 친정인 강릉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아들이 없는 친정에 사임당이 살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합니다. 당당하고 똑 소리나는 여성이었을 것 같습니다.

결혼 몇 달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기도 했고 시댁인 파주 파평면 율곡리에 살기도 헸으며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살았었다고 합니다.

가끔 친정에 가서 친정어머니 말동무도 해드리는 사이에 셋째인 율곡 이이를 강릉에서 낳았다고 합니다.

38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 ( 청진동 )에서 살다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고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몸이 아팠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때 사임당 남편의 나이 51세였고 사임당이 사망한 후 10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사임당이 죽기 전 어린 자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남편의 언행이 염려되어 유언으로까지 남겼는지,

재혼하지 말라는 사임당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이 원수는 재혼했다고 합니다.

아내의 유언을 지키지 않은 사임당 남편, 어지간한 사람입니다.

사임당은 뒤에 아들 율곡이이 덕분에 정경부인에

증직< 충신 효자 및 학덕이 높은 사람 등에게 죽은 뒤에 벼슬을 주거나 높여주던 일>

사임당의 유적지로는 탄생지인 오죽헌과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 조운산이 있습니다.

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율곡의 나이는 16세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금강산에 입산할 정도로 방황했다고 합니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한 외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은 관직에 나가서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율곡이 고백하기를

조정으로 본다면 신은 있으나 마나 한 보잘것없는 존재이오나 외할머니에게 신은 마치 천금의 보물 같은 몸이오며

신 역시 한번 외할머니가 생각나면 눈앞이 아득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아들 없는 집 둘째 딸로 태어나 시와 글씨 그림에 천재적 재능이 있어

자신의 재능을 꾸준히 발전시키며 살아온 신사임당은 인품과 재능을 두루 갖춘

최고의 여성이자 어머니 사임당, 율곡의 어머니로 유명하지만, 당시 신사임당이 살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당차고 당당한 여성 신사임당을 그려봅니다.

같은 시대 유명한 소세양이라는 시인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 신 씨의 그림 족자라는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놀라우리만치 뛰어났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그 시대 최고의 시인이 사임당 그림을 주제로 시를 지을 정도니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예술가이자 어머니입니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조선 최고화가 안견 다음가는 화가라 칭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여성이라서 안견 다음이라고 했을지, 아니면 정말 그랬을지 모르지만

하여간 최고임은 확실힙니다.

화가로 유명했던 사임당이 여성의 상징으로 존경받게 된 것은 사후 백 년이 지난 17세기 중반이라고 합니다.

유학자 송시열이 사임당의 그림을 보고 칭찬하고 감탄하며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을 낳았을 것이라는 평가에서 존경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율곡이 유학자들의 존경 대상이 되자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적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천재 화가 보다는 율곡을 낳은 어머니로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확고해져 갔다고 합니다.

사임당은 천지의 기운을 받아 율곡을 잉태한 여성이었고 훌륭한 태교와 교육을 통하여 율곡을 기른

어머니 사임당으로 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임당의 일생은 현모 현처인거 같습니다.

화가로 효녀로서도 훌륭한 여성인 신사임당을그 시대에 남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으로

천재 예술가로서 사임당 일생보다 아내로 어머니로의 삶이 더 나타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사임당을 존경의 대상이 되도록 했지만 사임당의 정체성을 고정화하게 되어

다양한 면으로 사임당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훗날 변화하는 시대에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시각으로 천재 예술가의 삶이 다시 평가되고 펼쳐지게 되는 그 날이 꼭 오게 될 줄 기대합니다.

이 땅의 21세기 여성의 본보기인 당당한 여성 신사임당으로 평가되기를.

사랑채를 지나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니까 작은 건물이 나옵니다.

예쁘게 지어진 건물은 조그마합니다. 이곳이 어제각이라고 하는데 벼루와 격몽요결이 보관되어있습니다.

정조임금이 율곡 선생의 벼루와 격몽요결이 보관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으로 가져오게 한 다음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칭송한 글을 새기고

격몽요결에는 머리글을 잘 지어 보관하라며 다시 보냈는데 임금의 명을 받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어제각이라고 합니다.

벼루는 어릴 때 율곡 선생이 쓰시던 것이라서 작고 예쁘게 생겼습니다.

 

 

얕은 생각과 마음으로 감히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가장 적은 부분이라도 알 수 있어 의미 있는 방문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임이 틀림없어 다음에 다시 방문하여 꼼꼼히 살피고 알아가며

민족의 자랑인 천재 예술가와 대학자의 삶을 조금씩 처음부터 알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무더운 여름철 또한 신께서 주신 사계절 중 하나로 무더위도 즐기는 것이 좋겠지요.

이제 본격적인 휴가철로 접어들게 되는데,

건강과 행복이 더해지는 알찬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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