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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 바람에 부치는 편지/내마음의 노래

나의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동백 아가씨 ]

배움ing 2011. 10. 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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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꽃 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 아가씨
가신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사랑하는 나의 엄마 ,
노래를 무척 좋아하시던 엄마.
특히 이미자 씨의 동백 아가씨를 좋아하셨던 엄마는.
아버지께서 집에 가져다 놓으신 편지지를 책처럼 엮어
모든 노래를 기록해 놓고 주변을 나팔꽃 등의 그림을 그려 꾸며놓으셨던 나의 엄마!
진학도 하지 않은 어린 나이인 저도[7살에 진학함]
동백 아가씨 친정어머니 영산강 처녀 수덕사의 여승 타인들 등등을 
자연스럽게 익혀 부를 줄 알았지요. 
글도 못 익혔는데 말이지요.

생일이면 햅찹쌀로 인절미를 만들어 주셨던 엄마.
살던 고장에 커다란 곡식저장창고가 지어졌는데
새로 지어진 곡식저장창고에서 콩쿠르가 열려 
주변 여려 동네의 많은 사람이 콩쿠르에 참가했었지요.
동백 아가씨의 열렬한 팬이셨던 엄마는 여섯 살인 저에게
콩쿠르 대회에 가서 동백 아가씨 부르고 오면 인절미 해준다는...
지금 생각해보니 지혜가 많이 모자랐나 봐요.
절구에 햅 찹쌀밥을 찧고 있으면 떡을 만들고 있다는 건데 그때는 그걸 모르는 바보라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부르기 싫다고 떼썼지만 이미 신청을 해놓은 관계로 무섭게 야단치셨는지..
아니면 딸이 노래 부르는 소리가 온 동네에 울리는 걸 듣고 싶으셨는지.

그때 그 일이 
50대 중반인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 속의 뚜렷이 남아 있는 사건이었답니다.

동백 아가씨는 가신님이 그리워서 울었지만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울었지요.
노래하기 싫다고 말이지요.

여섯 살 어린애가 무슨 헤 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가슴에 겨워 울을 일이 있었겠습니까.
동백 아가씨를 너무나 좋아했던 엄마의 불호령에 놀라서 결국엔
언니의 손에 이끌려 동백 아가씨를 부르고 딩동뎅 울리고 집으로 오면서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
서럽게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울면서도 손에 꼭 쥔 것이 있었는데 뭣인 줄 아세요.
당시에 인기 좋은 세숫비누 벌꿀 비누 8000번이라는 세숫비누 1갑,
울면서도 꼭 품에 안고 와서 엄마한테 드렸었답니다.

물론 칭찬은 받았지만 울다 지쳐 잠이 들고 다음날 눈을 뜨니 윗목에 양은 솥이 떡 하니 자랑용으로
모셔서 있더군요.
그건 제가 받아온 것이 아니고 제 큰언니가 성재희 노래 보슬비 오는 거리를 부르고
받아온 상이었답니다.
언니가 받아온 양은 솥이 한동안 엄마의 자랑이야기 주제였지요.
지금도 언니와 통화를 할 때면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엄마께서 동백 아가씨를 그렇게 좋아했답니다.
학교에 들어가 소풍을 가게 되었는데 상상 좀 해보세요.
제1학년 7살짜리가 소풍 가는데 올림머리를 하고 소풍 갔답니다.
상상이 가시나요?
동백 아가씨에서 엄앵란님의 머리 모양까지 좋아하는 우리 엄마 때문에 머리를 후까시를 해서
작은 핀으로 꽃아가며 머리를 올리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답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듯이 하는데 매우 아팠거든요.
당시에는 뽕이라고 하는 걸 머리에 올리고 머리를 부풀려서 핀으로 꽃을 때도 아프지만
머리도 무겁고 ㅠㅠㅠ 
즐거운 소풍이 아니라 힘겨운 소풍이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운동회. 소풍 갈 때는 찰밥에다 반찬도 여려가지를 준비해 
찬합(도시락통)에 담아 무겁게 들고 가서 먹어야 했지요.
.
그게 끝이 아니라 소풍에서 돌아오면 한 번 더 눈물을 쏟을 일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머리핀 빼고 원래대로 머리를 묶으려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동백 아가씨를 좋아하시니 동백 아가씨 머리까지 딸에게 해주셨던 나의 엄마.
무척이나 동백 아가씨를 사랑했던 팬이었답니다.
머리는 당시에 미용학원을 다니던 제 큰언니가 담당했답니다.

동백 아가씨 영화가 제가 사는 곳에 아직 상영되기 전
버스로 1시간을 가야 하는 고장에 먼저 상영이 되었는데 엄마는 빨리 보신다고
그곳에까지 가서 보시고 오셨답니다.
아버지께서 교육받으러 출장을 가시면 우리 집은 동내 아주머니의 이야기공간,
엄마가 보고 오신 동백 아가씨 영화이야기를 
동네아주머니에게 이야기해주시던 나의 엄마
내 나이 이제 오십이 훌쩍 넘어 엄마 생각나면 동백 아가씨도 함께 떠오른답니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는 이렇게 이만큼 동백 아가씨 엄앵란님의 열정적 팬이셨나 봅니다.

짧은 생을 살다 가신 내 어머니 

지금의 나는 엄마께서 사셨던 나이를 훌쩍 넘어섰지만 ...
 
요즘은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어요.
갱년기. 노화현상이라서 그런지 손끝에서 발끝까지 쑤시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욱신욱신
세월 따라 모든 게 변해가고 세월 따라 사람도 나이가 들고
쇠퇴하여 가는 건 당연하지만
아프지 않고 늙어가는 신약을 좀 개발해주세요. ㅡㅡ오.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안 아픈척 하려고해도 그게 여간해서 되지 않아.
괜스레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 그지없고 자녀가 안쓰러운 생각이 든답니다.
나의 엄마보다야 오래 살았으니 이 나이쯤이면 미련없는 삶이지만.
아들이 의젓한 청년이 될때까지 건강하게 곁에서 바라보고 싶은데
답답한 마음일 때가 많아지는 요즈음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관계없이 즐거울 때도 엄마가 먼저 떠오르고
나약해질 때도 엄마가 먼저 떠오르는 건
따스하고 포근한 엄마의 품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인가 봐요.
나의 엄마를 떠올리면 언제나 나의 기억 속의 엄마께서는 젊은 엄마이십니다.
언제나 영원히 사랑하는 나의 엄마를 그리며 오늘도 가만히 불러봅니다.
그립고 보고 싶은 엄마 ㅡㅡ. 아
보고 싶고 그립고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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